버킷리스트

나는 물건을 정갈하게 오래 쓰는 편이고 또 물건에 정이 들면 쉽게 버리지 못한다. 좋아하는 물건에 한해서 그렇다. 노트북, 휴대폰, 만년필 등이 그러한 유형의 물건에 속한다. 하나 더 추가하자면 책이 있다. 책은 무겁고 부피가 있어서 최근에는 거의 사 들이지 않는다. 책 욕심이 많았다. 있는 책들을 죽을 때까지 다 읽을 수는 있으려나, 하는 부끄러운 걱정도 한다. 요즘 책 읽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노안에 집중력 저하가 그 원인일 게다. 그래도 재미있는 책을 만나면 돋보기를 쓰고 후딱 읽어 내려간다. 침대 옆에 안 읽은 책들을 쌓아두고 있다. ‘집에 있는 책들 다 읽기’가 나의 버킷리스트에 한 줄로 올라갈 것이다.

어제는 남편이 삼성 노트북 최신형을 선물했다. 내가 쓰고 있는 컴퓨터도 사양이 나쁘지 않아 잘 쓰고 있는데도 5년이나 썼다면서 새 것으로 사주었다. 새 노트북을 보니 아이들처럼 금세 마음이 변했다. 포장을 뜯고 전원을 켜고 업데이트를 하고 계정 로그인을 하고 프로그램을 설치했다. 인터넷 속도, 키감 테스트를 끝내고 나의 신형 글쓰기 무기를 흐뭇한 눈길로 어루만졌다. 최신형이라 그런지 가볍고 슬림하고 미니멀하다. 인공지능까지 탑재되어 기존 노트북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사양이 좋다. 화면 터치가 되니 마우스도 필요 없다. 폰과 PC를 연결 설정하자 폰의 사진이나 파일을 PC에서 직접 볼 수 있다. 숫자판이 없으니 자판배열이 넓어 타이핑하는 손이 편하다. 아, 이래서 남편이 노트북을 바꿔줬구나. “여보, 나 밖에 없지?”하는 남편의 익살스러운 말투를 떠올리며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여보, 고마워! 이 노트북은 죽을 때까지 쓰겠네.” 물건 하나를 잘 보살피며 오랫동안 쓰는 나의 특성을 간파한 남편의 선제 구매 작전은 늘 이런 식으로 성공했다.

휴대폰과 노트북만큼은 최신형이 나오기 전부터 구매 예약을 하거나 출시하는 날 사줬던 남편의 깊은 뜻을 헤아리게 되자 가슴이 뭉클했다. 며칠 전 새 노트북을 구매했다고 했을 때 나는 남편을 나무랐다. 아직 쓸 만한데 또 바꾼다고. 프로그램 설치하기도 귀찮다고. 그랬더니 남편이 “당신 노트북을 새 걸로 바꿔주는 것은 내 버킷리스트 중에 하나야.”라고 했다. 나는 흠칫했다. 나는 사십대부터 나의 버킷리스트를 적어두고 있지만 남편의 입에서 나온 버킷리스트는 생소하고 불길했다. 지난 3월 국가 암검진 이후 자주 병원을 들락거렸고 안 보던 약병들이 늘어나고 있었으며 최근에는 S의료원을 다녀왔기 때문이다.

폐가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40여 년의 흡연 경력에 폐는 벌써부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숨이 가빠 4층 계단도 오르기 힘들어하는 남편을 오래 전부터 걱정해왔다. 올해 봄 대학병원에서 받은 CT 검사결과에 대해서 별일 없다고 얼버무리는 것부터 이상했지만 자세히 물어보기가 두려웠다. 보름 전, 심상치 않은 기분이 들어 용기를 내어 물어보니 폐암 의심으로 몇 달간 정밀검사를 받고 있다고 했으며 곧 결론이 날 거라고 했다. 최종 진단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린 그날, 그는 장을 가득 보고 환한 표정으로 귀가했다. 그날, 나는 오늘은 맘껏 웃으리라, 는 제목의 기록을 남기고 자녀가 서울대에 합격한 기분이 이랬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제 저녁, 밥상을 차리는데 남편이 무심한 표정으로 8월부터 S 의료원에서 치료를 받는다고 했다. 무슨 치료인가고 물었더니 방사선 치료라고 한다. 암이구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어서 그는 병원 세 곳의 의무기록사본, 영상CD, 진단서, 치료계획 등을 건네주었다. 천천히 보라고 하면서. 암이 하필 심장대동맥 근처에 자리를 잡고 있고, 폐기능이 50% 미만이라 수술은 힘들지만 방사선(양성자)으로 암 조직을 정교하게 태워 없앤다는 것이었다. 저녁밥은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설거지를 끝낸 후 병원 서류들을 읽고, 그동안의 진료경과 메모까지 읽은 후 산책을 핑계로 바깥에 나왔다.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폐암 의심에서 폐암 진단까지 피 말렸던 기다림이며, 투병 중인 나를 챙겨주느라 자신의 몸은 챙기지 못했던 남편이 너무나 불쌍했다. 이런 상태로 작년 한 해는 하루에 열 시간 이상을 쉬지 않고 일했다는 것이 가슴 아팠다. 몇 년 전 이미 폐암 의심 소견이 있었는데 왜 일찍 정밀 검사를 받게 하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 병원에서 해피콜만 해줬어도 하는 원망과 함께. 어지간한 일에는 눈도 깜짝 안 하던 남편이 저렇게 기가 죽은 걸 보니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을까, 생각할수록 측은했다.

올해에 들어서면서 숨이 가쁘고 자주 감기에 걸렸으며 감기에 걸렸다 하면 보름씩 미열이 있어서 암을 의심하며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보라고 권했고 설마 했는데 역시나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남편은 마눌이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보라고 해서 그나마 목숨은 건졌다고 기뻐했고 그럴수록 나는 가슴이 아팠다. 남편의 몸이 부쩍 쇠약해진 것 같아 좀 쉬게 하고자 내가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을 때, 얼마 안 지나면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미뤄달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암이라는 말은 못하고 혼자서 얼마나 속을 태웠을까. 어느 날 갑자기 술과 담배를 끊었을 때, 사실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나는 한사코 회피했었다. 냉정히 생각하면 남편의 생활습관으로 봤을 때 올 것이 왔을 뿐 놀라운 결과는 아니다. 내가 이 남자를 잘 돌봐야 한다는 사명감이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든다.

이젠 나도 환자를 돌볼 수 있을 만큼 건강이 회복되었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그가 방사선 치료를 잘 견뎌낼 몸을 만들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암환자 중심의 음식을 구상하고 요리하고 정갈하게 밥상을 선물하리라. 술과 담배를 끊었고, 암도 전이가 되기 전에 발견했으니 발상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남편은 운이 좋은 편이다. 남편의 말대로 천재일우의 기회이니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건강관리를 하길 바란다.

옷을 담뱃불에 태우고, 이불에 불이 붙고, 집안을 담배연기로 채우더니 이제는 폐에 암 덩어리까지 만들었다. 담배라는 골칫거리로 부부 사이의 감정이 멀어졌던 지난날을 생각하니 가슴이 쓰리다. 당신의 건강을 위한 아내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던 남편이 야속하지만 지금은 환자에 대한 측은함이 원망을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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