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은 공유할 것이 못된다

“병은 자랑하라.”

어릴 적 들었던 말이다. 숨기지 말고 드러내어 치료의 기회를 얻고, 주변의 도움을 구하라는 생존의 지혜였다. 의료 시스템이 전무하던 시절, 병을 알리는 행위는 곧 공동체의 부조를 불러오는 유일한 구조 신호였기 때문이다. 그러 시절에는 타인의 에너지를 빌려오는 것이 곧 삶을 지속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세상은 변했고 우리는 각자의 섬에서 훨씬 더 복잡한 불행과 중증의 고통을 마주한다. 이제 타인의 동정은 치유가 아닌 ‘낙인’이 되어 나를 그 아픈 자리에 고착시킨다. 함부로 내뱉은 불행의 소식은 순식간에 외부로 흘러나가 나의 에너지를 갉아먹는 구멍이 된다. 과거의 ‘자랑’이 생존을 위한 외침이었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고통을 스스로 연소시키는 ‘침묵의 용기’다.

내 고통의 무게를 타인과 나누려 할수록 나의 내면은 더욱 취약해지고 정작 치유에 써야 할 생명력은 밖으로 흩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때이다. 내가 의학을 전공했기 때문인지 내 주변에는 중증질환을 앓는 환자들이 많다. 나는 그들에게 불편한 질실을 알려주고 싶다. 그들이 고통을 외부로 발산하는 대신 응축하여 운명적 에너지를 회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먼저 왜 불행을 공유하는 것이 ‘동정’이 아닌 ‘손실’인지 알아보자.

우리는 흔히 고통을 나누면 반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산전수전을 겪으며 삶의 결을 다듬어온 사람들에게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오히려 위험한 격언으로 들린다. 정보가 부족하고 공동체 의존도가 높던 예전에는 확실히 그래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원하면 혼자서도 충분히 정보를 찾을 수 있고 각자도생의 시대를 살고 있어 불행을 입 밖으로 내어 타인과 공유할 때, 짐을 덜어내는 것보다는 내 안의 에너지를 밖으로 유출하는 구멍을 뚫는 행위가 된다. 당분간은 답답함이 풀려 시원한 것 같지만 그 구멍으로 천기가 누설되고 에너지 손실을 초래한다.

불행을 공유하는 것이 득보다 실이 큰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에너지의 누수(Leakage)다. 내면의 불행은 그 자체로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다. 그것이 감당하기 벅찬 중증질환이든, 인생의 굴곡진 사건이든, 이 에너지는 내 안에서 소화되어야 할 ‘숙제’다. 하지만 이를 언어화하여 외부로 쏟아내는 순간, 그 에너지는 나의 회복을 위해 쓰여야 할 연료를 낭비하는 꼴이 된다. 말은 파동이고 에너지다. 부정적인 상황을 반복해서 발화할수록 그 파동은 나의 기운을 상쇄하고, 치유를 위한 응축의 시간을 분산시킨다.

둘째, 타인의 시선이 만드는 ‘낙인’의 고착화다. 최근에 지인으로부터 오랜만에 전화 한 통이 왔다. 반가웠다. 내 건강을 묻는 안부 전화였고 나는 회복되어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대답했다. 내가 기대했던 대답은 “어머, 다행이다. 축하해!”였다. 그런데 상대방은 “진짜? 거짓말이지?”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었더니 “언니는 아파도 안 아픈 척하는 사람일 것 같아서”였다. 지인의 대답을 듣고 나는 한참 생각에 잠겼다. 지병을 포함한 불행은 결코 공유할 것이 못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녀에게 악의가 있어서 내뱉은 말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녀에게 내가 ‘환자’로 고착되어 있다는 사실은 불쾌감을 넘어 불길한 느낌을 주었다. 비록 그들이 건네는 위로가 진심 어린 동정이라 할지라도, 그 시선은 본질적으로 나를 ‘피해자’ 혹은 ‘환자’라는 약한 존재로 규정한다. 타인의 관점에서 이미 고착된 나의 이미지는 나의 무의식에 스며들어, 스스로를 더 나약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족쇄가 된다. 나는 나를 치유하고 싶은데, 세상은 자꾸 나를 그 아픈 지점에 머물게 하는 것이다.

셋째, 운의 주도권 상실이다. 운명이라는 것은 내면의 고요가 깃들 때 비로소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조율된다. 하지만 불행을 공유하면 나의 운명적 흐름이 타인의 반응과 평가, 또는 ‘관심’을 가장한 궁금증의 외부 변수에 휘둘리게 된다. 내가 침묵할 때 나의 운은 오직 나만의 것이 되지만, 불행을 공론화하는 순간 그 운명은 타인의 가십, 동정, 혹은 오해라는 불순물에 오염되고 만다. 고요한 호수에 돌을 던져 스스로 파문을 일으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병고의 무게를 견디며 깨달은 것은, 진정한 용기란 내 고통의 무게를 타인에게 짊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무게를 온전히 홀로 감당하며 내 안에서 불꽃으로 태워버리는 것임을 알게 된 점이다.

이제 나는 안다. 불행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오직 나만이 다루어야 할 내면의 숙제이자 자산이라는 것을. 입을 닫고 고요히 나만의 몰입으로 돌아간다. 걷고, 읽고, 뜨개질하고, 밥을 지어 나를 정성껏 대접한다. 외부로 새어 나가던 에너지를 오직 나를 위해 수렴할 때, 비로소 나의 운명은 외부의 간섭 없이 가장 단단하게 재편될 것이다.

불행이 알려질 때 주변인들은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니 심적 부담을 느끼게 된다. 다들 자기 살기에 바빠 공허하고 무의미한 위로를 내뱉게 된다. 상투적인 위로에 형식적인 감사는 불편하다. 불행의 늪에 빠진 사람에게는 허탈감만 안겨줄 뿐이다. 그중에 누군가가 당신의 ‘천기’를 알고 진심으로 가슴 아파하며 물심양면으로 도와준다면 그 은혜는 죽을 때까지 보답하라.

불행은 공유할수록 희석되는 것이 아니라, 공유할수록 나의 생명력을 갉아먹는 ‘손실’이다. 그 손실을 멈추는 것, 그것이 내가 찾은 고독의 미학이자 가장 강력한 운명 관리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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