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음’으로 쓰고 ‘행운’이라 읽는다

“유방암 환자의 경우, 치료를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의 수명이 같다는 거예요.” 어떤 의사의 체념 섞인 말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 의사는 60대 중반쯤 되어 보였다. 나도 일부 공감하는 바이다. 사람은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장기 기능이 자연스레 떨어지고 몸에 이런저런 병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녀의 말은 나에게 이런 질문을 남겼다. ‘치료해서 연장된 유병 수명과 몸에 질병이 있는지를 모르고 치료하지 않은 상태의 수명이 같을 때, 치료가 과연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정작 중증질환 환자가 되면 질병이 주는 공포가 너무 크기 때문에 치료받고자 하는 염원이 우세한다. 양의의 치료라는 것은, 잘하면 3을 내주고 7을 얻는 것이고 못하면 7을 내주고 3을 얻을 수도 있다. 그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나이를 먹으면 병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고 싶어요.” 사실 나도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중증질환이 아니면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했고 실제로 7년 동안 간헐적 요통을 겪으면서도 병원에 가지 않았다. 그게 콩팥의 문제였고 치료 후 통증을 없애는 대신에 한쪽 신장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통증과 신장 하나를 맞바꾸고 나니 허탈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한동안 이 일을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았다. 환자에게 맞는 의사를 만나면 이득이 클 것이고, 돌팔이 의사를 만나면 실이 클 것이다. 환자에게는 좋은 의사를 만난다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이다. 바꾸어 말하면 환자가 좋은 의사를 만나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다.

어제는 5년 전 위암 수술을 하고 지난 6월 척추 압박성 골절로 수술치료를 한 지인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정형외과에서는 척추 수술로 의사가 할 일은 다 했다면서 그를 퇴원시켰지만 환자는 골다공증과 지속되는 칼슘 부족의 원인을 알고자 여러 과를 전전하면서 각종 검사를 받고 있었다. 암 전이도 없고, 부갑상선에도 이상도 없었으며, 혈액암 소견도 없었다. 다양한 검사를 했지만, 검사 결과상 유의미한 증거가 없어 의사는 환자를 집으로 돌려보냈지만, 환자는 원정 치료까지 고려하고 있었다. 휠체어에 의존하는 불편한 몸으로 원정 치료까지 하게 되면 에너지가 고갈되고 면역력이 떨어지면 감염 등 다른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나는 그에게 낙상을 조심하면서 집에서 잘 먹고, 잘 자고, 재활치료에 집중할 것을 권했다. 나는 그에게 양의는 원래 인체를 여러 파트로 나누어서 치료하고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추적 관찰하는 시스템이라고 알려주었다. 오죽하면 두 콧구멍도 치료하는 의사가 다르다고 말하겠는가. 환자는 많고, 의사는 한계가 있으니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양의에게 전인적(全人的) 치료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의사의 문제가 아니다. 양의는 원래부터 인체를 여러 파트로 나누고 의사는 할당된 분야만 진료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인체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어느 한 장기의 문제가 다른 장기에 원인을 두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의사는 진료 시간이 한정되어 있고, 자신의 과에 해당하는 질병만 보기에도 버거운 상황이다. 병원과 연을 맺은 환자들은 여러 과를 전전하면서 고통을 겪는다. 폐결핵 환자의 경우, 약물치료로 폐결핵은 고쳤지만 신장이나 간장, 뼈가 약물 독성으로 손상될 수 있다. 암 환자들도 방사선치료나 화학요법 이후 유사한 증상을 겪는다. 특히 식욕, 면역력, 소화 기능이 떨어지고 운동량이 줄어들면서 골다공증, 근 손실이 생길 수도 있다. 이를 거스르는 힘을 가진 사람들은 치료 후의 부작용을 잘 극복한다. 억지로라도 밥을 먹고, 꾸준히 운동하고, 잠을 충분히 자고, 살아서 다행이구나, 하는 감사하는 마음을 유지하면서 몸을 일상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회복시킨다. 의사의 자질도 좋아야 하지만 환자도 지혜로워야 생존율을 높이면서 삶의 질을 꾀할 수 있다.

50대는 죽음이 보이기 시작하는 나이다. 인체 기능의 상실과 주변 친인척의 사별, 지인의 병고 등으로 죽음이 생각보다 가까이 있음을 느낀다. 삶은 상실에 대한 애도, 이별의 연속이다. 70대가 넘으면 물건을 줄이고 죽음을 자연현상으로 받아들이는 수용 심리,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통합 인지가 필요하다. 이러한 사고 훈련은 과도한 욕망을 줄이고 마음을 고요한 상태에 머물게 하며 죽음에 초연한 태도를 길러 줄 것이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무지와 불확실성 때문이다. 실제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의 인터뷰를 들어보면 죽을 무렵 크게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뇌가 자연적으로 엔도르핀과 같은 진통 물질을 분비하여 고통을 완화하려고 하거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게 되면 고통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죽음은 두렵고 무겁다. 매일 죽음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한다. 죽음을 잘게 부숴 하루치의 삶에 조금씩 할당한다. 그러면 삶의 일분일초가 소중하고 기적처럼 느껴진다. 생존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그저 살아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깊이 있게 살아내는 데 집중하게 된다. 끝내는 ‘살아있음’이라고 쓰고 ‘행운’이라 읽는다.

엊저녁 공원에서 산책하는데 우지직 소리와 함께 커다란 나뭇가지가 내 앞에 툭 떨어졌다. 엄청 높은 곳에서 떨어진 족히 3미터는 되는 굵은 나뭇가지였다. 저 키 큰 나무에 간신히 붙어있던 썩은 나뭇가지가 빗물에 젖으면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부러진 것이다. 불과 몇 발짝 앞의 광경이었다.

“‘살아있음’으로 쓰고 ‘행운’이라 읽는다”에 대한 2개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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